2007년 09월 22일
이무기
(<디 워> 엔딩에 나오는 아리랑. 들으려면 화살표 클릭.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그 원망이, 원한이 오랜 시간을 곰삭아 한이 된 노래. 슬픔의 신체를 사를 때 때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지는 액즙 같은 노래.)
이무기는 승천을 꿈꾸는 욕망의 존재다. 그러한 욕망이 좌절될 때 그것은 원한의 존재가 된다. 그러한 원한이 세계에 대한 의식과 자기의식을 획득할 때 반역의 존재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이무기는 '한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의 존재로서의 이무기는 한반도 민중들의 집단무의식적인 자기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 수천 년을 역사라는 강의 맨 밑바닥에 웅크려 살면서 여의주 하나 물어 승천하는, 그 불가능한 꿈.
사실 그들이 흘린 눈물만 모아도 이무기 몇 마리 웅크려 살기에 족할 만큼 커다랗고 긴 강 하나쯤은 흐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강물 같은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요즘은 이무기도 부박해진 시대의 기류를 타고 틈만 나면 물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공들여 여의주를 키우기보다는 '바다 이야기'에 풍덩 빠지거나 로또라는 기연을 만나 일거에 여의주를 물어오겠다는 것이다.
딱하다. 하지만, 한탕주의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한탕주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물론 대개는, 아니 99.9..%는 실패하겠지만), 그들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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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이무기는 때~한민국의 집단무의식적인 자기표상이기도 하다. 그 무의식 속에 웅크려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무기 역시 여의주를 손에 넣어 용이 되어 승천할 날을 꿈꾸고 있다. 물론 단순한 여의주여선 안 된다. 여의주 중의 여의주, 세계 1등가는 휘황찬란한 여의주여야 한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를 연발해대는 반도체,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복제기술, 그리고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보여주는 컴퓨터 그래픽(CG) 기술 같은 것이 그런 상상적 여의주일 것이다. 여의주야 여의주야, 어서 빨리 자라서 세계 일등 먹어라~!
바로 이런 면에서 '황빠'와 '디빠'는 맥이 통하고, 그 둘의 교집합에 속하는 대중들은 비슷한 논리로 무노조 삼성(때~한민국을 말아먹으려는 독과점 대기업집단)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에구, 환상적인 욕망이긴 하지만, 역시 딱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다. 쩝. 사실 때~한민국이 지금 이 정도나마 경제발전도 하고 해서 그나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한 것이다. 반만 년(?) 동안 이놈 저놈한테 얻어터지기만 했는데, 가끔 한번쯤은 후까시도 잡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제적으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좋은 나라가 아니라, 때~한민국의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의) 변화가 다른 나라들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 만큼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왜 거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먼저 안에서 새지 않도록 해야 할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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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한'이란 무엇인가? 오랜 시간을 곰삭은 원한(좌절된 욕망, 욕망의 좌절)이다. 욕망하는 몸뚱이도 곰삭고 욕망의 대상도 곰삭아서 형체 없는 진국만 남은 것이 한이다. 그것이 미적 차원을 획득하면 예술이 되고, 사회적 차원을 획득하면 반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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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심형래씨가 이무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파바박-, 필이 꽂히는 듯했다. 오 심형래, 뭐 좀 있는데! 이무기! 얼마나 그럴듯한 캐릭터인가. 짜자잔-, 애걔........
이무기는 결국 반역의 존재다. 나라면 천상(天上)의 용에 도전하는 반역의 존재로서 지상(地上)의 이무기를 그리겠다. 천상과 지상의 대립은 언제나 지상에서 반복되는 법이다. 천상의 신과 지상의 인간의 대립이 지상에서 사제와 민중의 대립으로 반복되듯. 따라서 천상의 용과 지상의 이무기의 대립은, 지상에서 용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이무기-사제와 그에 저항하는 이무기-민중의 대립이 되어야 한다(초월성과 내재성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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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제 이 모든 것은 촌스럽고 구닥다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시대, 응어리진 아픔이 곰삭고 생각이 익을 시간을 갖기가 불가능할 만큼 모든 것이 후딱후딱 지나가고, 대량의 이미지와 말과 스펙터클이 살포된다. 한마디로 지극히 감각적인 우리 시대는 한도 없고, 그 한이 사회적으로 전위된 반역도 없으며, 그 한이 미학적으로 전위된 예술도 없다.
이제 반역(정치)과 예술은 다른 원천을 끌어와야 하는 건가. 기쁨, 역능, 탈주, 놀이 같은 것..?
無情遊.
# by | 2007/09/22 07:02 | 씨부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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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환상 같은 것은 한보다는 걍 욕망의 상상적 충족 같은 것 아닐까요? 한은 욕망이 좌절된 것이고, 그것도 단순히 좌절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응어리질 시간을 주지 않지요. 님도 말씀하셨고(카타르시스, 환상), 저도 본 글에서 썼듯이요.
감긴지 몸살인지, 몸이 좋지 않아 이제야 엉터리같은 본글을 채워넣었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무정유님의 욕망의 키워드에 대한 글은 언제나 저를 숨막히게 합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요. 감기 몸살에서 나으시려면 잠시 욕망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한가? 가령, 이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혹은 그는 멀리 있습니다. 너무 그립지만, 도저히 만날 수도 없고 연락조차 쉽지 않습니다. 근대적인 교통통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그 응어리가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가면서 곰삭게 되겠지요. 자신의 욕망하는 신체도 곰삭고 그 대상도 곰삭아서, 삶의 진국 같은 한이 됩니다. 혹은 슬픔의 신체를 사를 때 똑, 하고 떨어지는 한방울 액즙같은 한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맘만 먹으면 비행기 타서 금방 갈 수 있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즉각즉각 통신할 수 있는 시대에는 그러한 이별의 한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통통신을 비롯한 근대적인 여러 조건들 때문에 한이라는 것이 이제는 촌스럽고 구닥다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근대적인 것이라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닐 겁니다. 잔존하겠지요. 더구나 한국은 그 어느 곳보다도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곳이라 하지 않습니까.)
뭐 이런 차이는 '한'이라는 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요. 아무튼, 저의 별 볼일없는 글들을 제법 읽어주신 모양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경로를 돌아보라"는 것을 인용해주시다니.. 저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