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24일
중단되는 음악?
Chausson,Ernest (1855,1,20- 1899,6,10 불란서)
Poeme Op.25
violin - Ginette Neveu
(음악이 나오지 않는 경우, 다음 주소를 클릭할 것..
(물론 쇼송의 <시곡>은 중단없이 이어집니다..)
나치의 SS보안방첩부(SD) 수장으로서 한때 게슈타포와 국가보안본부까지 지휘하기도 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홀로코스트’, 다시 말해 유태인 대학살의 입안자였습니다. 생전에 그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이드리히는 힘든 일과를 마친 후에는 항상 자신의 동료들과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현악사중주는 서양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장르가 아닐까 합니다. 처음 제가 현악사중주라는 장르의 음악을 들었을 때(아마 베토벤이었을 겁니다), 폐쇄공포증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좀 갑갑하더군요. 동종의 악기들끼리 하모니를 펼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순수한’ 음악 만들기라는 점에서 현악사중주는 뛰어나지만, 그만큼 폐쇄적인 느낌, 갑갑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왜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들었을까요? 혹시 밖에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고는, 베토벤의 순수한 음악을 들으면서 손에 묻은 피를, 마음속까지 배어있는 피 냄새를 지우려 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자신의 도살자적인 정신을, 영혼을 정화시키려고 한 것일까요?
글쎄,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하이드리히 자신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분명한 것은, 하이드리히의 진실은, 음악을 듣고 정화되는 그 주관적인 느낌이나 내면의 정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에서 벌이는 객관적인, 그 외면적인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수한 아리안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순수한 독일을 만들겠다는 나치의 망상, 그래서 그러한 순수한 독일로 ‘침입’해 들어오는 유태인들을 박멸하겠다는 그러한 발상은, 어쩐지 네 개의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현악사중주의 순수한 음악 만들기와 통하는 점이 있는 듯도 해보입니다. 그렇다고 현악사중주를 나쁘게 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은 현악사중주를 들어도 예전처럼 폐쇄공포증 같은 것도 느끼지 않구요. 좋아하는 곡들도 있습니다. 음악 자체야 뭔 죄가 있겠습니까?
지네트 느뵈가 연주한 쇼송의 <시곡>을 퍼와서 올립니다. 예전에 정경화의 연주로 들은 적이 있는데, 느뵈는 어제 처음 들었습니다. 비행기 사고라는 폭력적인 운명의 느닷없는 개입으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던 그녀의 바이올린(이제는 세월의 먼지를 느낄 수 있는 모노랄 바이올린 음)을 들으면 그 자체로 가슴이 아려옵니다. 어쩐지 그녀의 삶은 쇼송의 <시곡>처럼 중단 없이 이어지다 아쉽게도 그토록 여운을 남기고 끝났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느뵈의 연주를 듣다보면, 자꾸 끼어드는 기침소리 같은 잡음 외에도 중간에 덜컥 하고 연주가 몇 번 끊깁니다. 원래 그런 건지 변환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음악은 중단되기도 해야 합니다. 순수한 음악도 좋지만, 가끔은 그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타자들의 기침소리, 침 넘어가는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심지어 코 고는 소리조차 감내해야 하며, 때로는 아예 음악을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 피와 살을 가진 타자-사람들과 부대끼기도 해야 합니다. 거기서, 혹은 돌아와서, 중단된 음악은 다시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계속된 음악은, 어쩌면, 이미 다른 음악이겠지요.
날씨가 좋은 것 같습니다. 다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
다 좋은데, 우째 대학 신입생을 위한 음악윤리개론 같다. 때론 음악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듯 음악에, 미술에, 문학에, 영화에, 사유에 잡아먹히는 것도 필요하다(그때 생산과 소비의 경계는 사라진다). 아니,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체 속으로 한없이, 억제할 수 없는 어떤 힘들(가령 반은 자기 안의 힘, 반은 음악의 힘)에 의해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고호가 그랬던 것처럼, 17년간 <혼불>을 쓰면서 자신의 삶의 육신마저 그 제단에 바친 최명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미쳐버리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속에 또한 삶이 있고, 세계가 있으며, 타자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같은 것이면서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나는 미쳐버릴 수 없어 불행하다. 무엇을 하든. 미쳐버릴 능력이 없는 나는 약하고 무능력하다.
無情遊.
# by | 2008/05/24 19:36 | 예술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