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2월 12일
비판과 자기비판에 대해
(진보누리에서 박재혁이라는 분의 글을 읽고 쓴 것으로 기본적으로 그런 진보좌파 게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임.)
1. 비판과 자기비판
내가 어떤 대상, 사태에 대해 발언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될 때, 기본적으로 나는 그러한 발언이나 비판이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또 그렇게 말한 적도 많다. 가령 내가 즐겨 쓰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반성 없는 비판은 맹목적이고, 비판 없는 반성은 나약하다." (여기서 반성은 자기비판이라고 해도 좋다.)
당근 나는 저 말대로 늘 행동하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너무도 부족한 나는 그저 가끔, 문득, 저런 말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가다듬고 추스를 뿐이다. (그래야 할 때가 왔나?)
박재혁(이하 존칭 생략)의 글 <결별하라, 필객들과>는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박재혁의 글을 박재혁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필자들에 대한 것으로 읽어보았다. 그 다음 나 자신의 글쓰기와 관련해서 내가 평소에 주절거렸던, 반성이 어쩌구 비판이 저쩌구 하는 저 말을 꺼내들었다. 기억의 창고에서.. 오래 묵은 것이 아님에도 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지점에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사이트에서 글을 쓰고 읽고 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 조건과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2. 온라인 공간의 조건과 한계, 가능성
온라인 아바타로서 내 삶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짧다. 본격적인 온라인 생활이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피시통신이나 인터넷 같은 온라인 공간의 이런 진보좌파 정치게시판은 원래, 즉 애초부터 진중권이나 수군작, 그리고 진보누리를 만든 주역들 등등 386 지식 진보좌파들을 포함하는 소위 다소 '먹물적인'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그게 이런 게시판의 '초기조건'이다.
아무튼 이와 관련해서 박재혁은 상당 부분 옳은 말을 한다..
"냉혹하게 말하면, 아직 노동진영이나 진보진영에서 넷 세계를 무대로 대중을 상대로 발화하는 이들은 지식인, 몰락한 386. 혹은 출판사 및 지식산업계를 떠도는, 현장과 관계없는 '관념적' 좌파들이 거진이다.
간혹 현장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 이 곳에서도 글을 쓰지만, 대중이 추천 때리고 달려드는 건 그러한 것보다는 조금은 외연적으로 넓고, 느슨한 주제들로 개혁성의 욕구를 채워주는 강단 지식인 성향의 좌파나 시민들이 많다." (박재혁)
맞다. 하지만 단순무식하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아니,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박재혁 자신이 말하듯, 대중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 때리고 달려드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왜곡된 구조(그 왜곡의 원인이 무엇이든)지만, 어쨌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동하는 걸 누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찔리는 얘기지만, 현장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들은 이런 게시판 많이 찾지 않는 것 같다. 논리와 글빨 깨나 갖춘 '선수(운동가)'라면 모를까. 한 노동운동가에게 피플타임즈(요즘 진보누리는 쪽팔려서..)를 소개해줬더니, 자기는 글솜씨가 엉망이라서 그런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게 두렵다는 것이다. '의식' 있는 학출도 그런데, 일반 노동대중은 오죽 하랴.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가 진보누리와 같은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가능성은?
이런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에 무슨 적극적인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 초기조건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에 바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리라.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의 초기조건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에 바탕해서 결국 그 자체를 극복하거나 바꿔나가려는 것이리라.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런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회의마저 든다. 지금 깽판 분위기만 탈피해도, 아니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다행일지 모른다.
근데 이건 좀 작은 문제인데, 아무리 진보좌파 게시판이라 해도, 피플타임즈와 진보누리는 다른 것이고(더욱 달라지고 있고), 진보누리에서도 쟁점토론실과 누리카페는 구별해야 한다. 왜 누리'카페'인가? 한가한 소리도 하라고 그런 이름 붙인 게 아닌가? 음악 듣고 그림 감상하면서 일상의 얘기들(전에 나도 그런 글을 많이 썼다)도 나누고, 가끔은 사치스런 교양욕구도 충족시키고.. 그리고 똑같은 정치적 주제를 놓고 말을 할 때도, 피플타임즈에서 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진보누리에서 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데, 진보누리에서도 쟁점토론실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선동적으로 글을 쓰고, 누리카페에서는 보다 성찰적으로 조근조근 살펴보는 글을 쓰는 게 좋을 듯하다.
내가 민주노총에 대한 글을 (쟁점토론실이 아니라) 누리카페에 올리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누리카페의 내 글들이 그 글이 쓰여진 장소와 맥락을 벗어나서 진보누리 대문에 실리거나 피플타임즈로 펌되면, 영 맥아리 없고, 명확한 전선에서의 투쟁과 어긋나는 이상한 글이 돼버릴 수 있다.
3. 교양과 계급재생산
이 소제목은 원래 박훈인이 오래 전 쓴 글 제목이다. 박훈인은 진보누리 쟁점토론실에 쓴 <교양과 계급재생산>(http://board.jinbonuri.com/view.php?id=fight_board&page=1&sn1=&divpage=1&sn=on&ss=off&sc=off&keyword=박훈인&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68))라는 글을 써서 단숨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 내용은 보편교양을 습득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언술 능력이 부르주아 지배블럭(특히 그중 지식인 분파인 문필가, 예술가, 변호사..)의 필수조건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진보적이고 똑똑한 네티즌들이 죽때리고 있는 온라인 공론장에서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좌파의 결정적인 실수라는 것이다.
당시 박훈인의 이 글에 대해 내가 몇 가지 사소한 비판을 한 게 인연이 돼서 지금도 서로 아는 척하고 지낸다. 그 비판 중 하나는 2.에서 말한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의 초기조건과 한계에 대한 것이다. 오늘은 좀 다른 식으로 박훈인의 저 글 요지에 대해 말해보자.
내가 볼 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첫째 그렇게 말하는 박훈인 역시 자기 말의 표적에 해당된다는 것(당시 비판에서는 '자기지시적'이라고 표현했다)이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해서 박훈인의 저런 말은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박훈인 역시 (첫째에서 말했듯) 그 자신의 비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한에서다. 자기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저런 비판을 할 수 있다. 다시 하번 말하면..
반성(자기비판) 없는 비판은 맹목적일 정도로 자기소외된 것이고, 비판 없는 반성(자기비판)은 공허하고 나약하다......................
내가 알기로 부르디외는 자기가 속한 아카데믹한 세계에 대한 비판을 누구보다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런 비판이 자기가 속한 세계를 겨냥하는 것이므로, 칼날이 바로 부르디외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것, 너무나 명백하다. 당근 부르디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속한 세계를 가차없이 고찰할 때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으로 내가 나의 고유한 분석의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도구들을 내놓게 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 중에서.)
(다시 또 한번 이 글의 요지에서 살짝 벗어나는 여담 하나를 해보다. 내가 부르디외의 저런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지적인 과시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내 경우는 그렇다. 나는 내 생각이나 아이디어의 소스를 밝히고, 다른 사람들도 필요하면 찾아보라고 밝혀두는 것일 뿐이다. 그게 먼저다. 우리가 말하고 쓰는 것 상당수는 그렇게 다른 데서 얻어듣고 주워들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부르디외가 자신의 분석을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말해 학문이나 그 세계에 대해 그가 했던 말들이 그 누구 아닌 바로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부르디외의 글들은 역설적으로 설득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의 칼날 앞에서 자신을 면제시키지 않는 것, 자신의 비판이 겨냥하는 표적에서 자신을 제외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르디외에게 "셧 업!"하고 외쳐야 하는가? 박훈인에게 "아가리 닥쳐"하고 욕을 해야 하는가? 박훈인 대신 무정유에게 그런 욕을 하면 그나마 좀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런 욕을 아무한테서나 얻어먹고 싶지는 않다. 욕을 먹어도 부르디외처럼 자신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백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한테 얻어먹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온라인 진보좌파 게시판에서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 대중의 침묵을 차라리 욕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해. 그런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삶의 현장과 유리된 지성주의가 문제라면, 무차별적인 반지성주의 역시 문제다. 나는 박재혁이 전에 얼마나 지성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글을 잘 쓰고 싶다고 했던 그의 발언은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는 그러했던 자신을 부정하고, 그러한 부정을 타인과 이런 온라인 진보좌파 공간으로 확대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 나름의 사연과 이유가 있는 발언이겠지만, 그러나 그게 혹 이쪽 극에서 저쪽 극으로 옮겨가는 행위라면 또 다른 공허만 남길 수도 있다고 충고해주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주제 넘게도..
無情遊.
# by | 2005/02/12 22:49 | 궁시렁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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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생명만 유지하는것 같습니다. 초기 온라인 좌파의 게시판(광장)의 가능성은
이제 짜게 식어버린걸까요? ^^ 요새는 블로그좌파(?)들이 횡행하더군요..
무정유님의 옛글을 요새 가끔 다시 읽습니다. 더러는 처음보는것도 있지만
그때 그시절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보누리, 피타 같은 장(場)이 활성화되길 바래왔습니다. 그러한 장은 일종의 가능성의 조건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 장이 없으면 제대로 (정치적인, 물론 넓은 의미에서 다양하게 정치적인) 담론을 나눌 기회가 아예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진보누리나 피타가 완전히 망해버렸다면, 그래서 새로운 사이트나 웹진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는 어설프게 '무제한의 자유'라는 공허한 모토에 사로잡히지 않길 바랍니다. 즉,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왈, "반성 없는 비판은 맹목적이고, 비판 없는 반성은 공허하다"라고 했다나 뭐랬다나..
저는 이 말을 대학 때부터 여러 번 써먹은 적이 있는데, 이 무정유가 생각해낸 독창적인 말인 줄 알고, 가끔 농반진반으로 자랑하기도 했었죠.^^